‘나눌 수 없는(indivisible)’ 욕망의 사슬과 작가의 정체성

정석범 미술사학 박사

마릴린 먼로가 관객을 향해 특유의 눈웃음을 흘리며 활짝 웃고 있다. 금발의 머리 위엔 원형의 머리 장식이 마치 떼어내기 불가능한 것처럼 견고하게 장식되어 있다. 그 장식 위에는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복제된 작은 얼굴들이 원호를 그리며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 도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 이태량이 이 번 전시회에 내놓은 작품들은 [존재와 사고]라는 명제 아래 추상으로 일관했던 종전의 작품과 비교할 때 사뭇 파격적이다. 언뜻 보기에 이 작품들은 앤디 워홀의 팝아트를 연상시킨다. 마릴린 먼로라는 대중 스타를 다루고 있다는 점과 모노크롬에 가까운 색면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팝아트와는 상당한 차이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일찍이 워홀은 자신의 작품이 지향하는 의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내 작품, 영화, 그리고 내 존재의 표면을 보시오. 나는 거기에 있을 뿐이오. 그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소” 그러나 이태량의 작품들은 이와는 반대로 관객에게 두터운 사고의 층위를 남기고 있다. 작품의 배후에는 존재에 대한 물음과 그에 대한 사색이 켜켜이 쌓여있다. 실제로 작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대상들을 낯설게 배치함으로써 관객에게 예기치 않은 사색의 공간을 제공하는 데 작품의 목적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작가가 오랫동안 부여잡아온 [존재와 사고]라는 작가 자신의 오랜 화두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단지 그 표현형식을 종전의 형이상학적 코드에서 형이하학적인 구체적 형상으로 그 무게 중심을 옮겼을 뿐이다. 물론 종전의 추상적 언어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가 예전에 즐겨 사용했던 원형이나 십자가의 모티프가 이번 전시 작품들에서도 희미하게 그 흔적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추상성을 지양하고 구상성이라는 바다 위에 [존재와 사고]의 배를 띄운 것은 시대의 패러다임이 언어에서 이미지로 전환하는 시점에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전달할 새로운 조형 방식의 필요성을 절감한 결과다. 문자언어에서 이미지 언어로의 권력이동은 문자코드로 구성된 버튼식 휴대폰의 터치폰으로의 전환, 2차원적 환영성에 의지했던 영화가 3차원의 가상현실로 진화해 간 것만큼이나 혁명적이다. 이미지의 시대를 맞이하는 작가에게 새로운 소통방식의 모색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작가가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미지 소비 주체(즉 후원자)의 성향을 명확히 인식해야만 한다. 구상적 이미지에 길들여진 대중들에게 이제 추상의 영역은 낯선 동토로 변해가고 있다. 작가가 대중을 설득하고 그들과 소통하려면 실든 좋든 그들에게 친숙하게